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국가/남아메리카 (문단 편집) ==== [[자니우 쿠아드루스]] ==== >'''쿠아두르스의 중국 방문''' > >"호외요 호외!" 그날 브라질 시내의 한 신문이 전파했습니다. 쿠아두르스는 공영권과의 관계 개선을 명시한 목적으로 동부를 방문했습니다. > >그의 방문은 외교 사절보다는 관광 방문으로 시작되었으며 자금성을 둘러보고 박물관을 방문하고 중국 제국 시대의 수많은 문화 유물을 목격했습니다. 이어 브라질 대사관에서 가오종우 중국 국가주석, 세르지우 드 케이로스 두아르테 브라질 대사, 미키 다케오 공영권 대사와 함께 멋진 만찬을 가졌습니다. 만찬은 대사와의 더 깊은 관계에 대한 브라질의 의도가 공개적이고 명시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모든 관련자들 사이에서 많은 우호적인 토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 >대사는 "우리는 반제국주의 투쟁에 참여하고 있으며 식민주의에 맞서 투쟁한 같은 생각을 가진 국가들과의 관계를 심화하기를 기대합니다. 형제로 서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의견을 통해 의도가 명확해졌습니다. 이는 미국의 이익에 위배되고 많은 국내 시민의 의견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너무 분명합니다. 많은 그룹, 특히 친 OFN과 좌익 조직이 "이런 나치!"와 같은 쿠아두르스에 대한 비난을 퍼붓습니다. 또는 "일본의 발끝을 핥는 놈!!"와 함께 신문 발행을 거부하려 했습니다 > >만찬 후 미공개 행사에서 쿠아두르스, 가오, 미키는 개인 사무실에서 만나 무역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했습니다. 그가 돌아온 후 쿠아두르스는 회담을 포함한 여행을 대성공으로 여겼습니다. > >>누가 쿠아두르스가 이런 짓을 할줄 알았겟는가?[* 해당 이벤트는 현실 역사에서 주앙 굴라르가 1961년 중국에 방문한 이벤트에 모티브를 받아 만들어진 이벤트이다. 여기서 굴라르는 우익 계열 세력에게 강렬한 비판을 받았다.] * '''집권이념: 보수적 포퓰리즘(보수민주주의, 국가민주연맹/국가노동당)''' * {{{#!folding 내각 * '''자니우 쿠아두르스''' 지도자 {{{#!folding 인물설명 >'''빗자루의 남자''': 매일 정치력 획득 {{{#green '''+0.10'''}}}, 안정도 {{{#red '''-5%'''}}} > >"브라질을 휩쓴 사나이"로 알려진 자니우 쿠아두르스는 브라질 정치 체제 내에서 독특한 인물이며 많은 사람들이 결코 달성하지 못할 높이에 도달했습니다. 마토 그로소에서 태어나 쿠리티바에서 자란 그는 나중에 상파울루로 이사하여 법학을 공부했습니다. 쿠아두르스는 1947년에 정계에 입문했는데, 권위주의가 점점 커지는 이스타두 노부 정권을 싫어하고 그에 맞서 헌신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949년 이스타두 노부의 붕괴와 함께 쿠아두르스는 자신이 정권에 큰 타격을 가했으며 정치에 대한 그의 열정이 깊어졌다고 믿고 황홀했습니다. > >그는 정치 경력을 지속하며, 브라질에서 모든 형태의 부패에 맞서 싸울 것이라고 주장한 유명한 반부패 운동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상파울루 시장에서 승리했지만 주지사 선거에서 아데마르 드 바로스에게 1%의 표 차이로 패배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를 멈추지 않았고 그는 빗자루로 부패를 쓸어 버리겠다고 선언했습니다. > >1960년에 그는 PTN, UDN, PDC와 기타 소수 정당을 포함한 많은 정당의 통합 후보으로 브라질 부통령에 출마했습니다. 이번 선거에서 쿠아두르스는 그의 대통령 러닝메이트를 능가하고 부통령의 자리에 도달했습니다. 그 남자가 대통령직에서 승리하지 않았다면, 쿠아두르스는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어떤 길이든 추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신 그는 매일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 위해 로트와 끊임없는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동안 지금까지 그가 대부분의 약속을 이행하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 >그는 자신의 과시적이고 극적이며 선동적인 방식을 유지하여 쿠아두르스가 결국 그의 계획을 실행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을 짜증나게 합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고집스럽게 브라질 국가의 부패를 근절하거나 시도하다가 죽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 * '''밀통 캄푸스''' 정부수반 (부통령) {{{#!folding 인물설명 >'''조용한 일꾼''': 매일 정치력 획득 {{{#green '''+0.15'''}}}, 자원 획득 효율 {{{#green '''+10%'''}}} >많은 사람들에게 밀통 캄푸스는 오랜 과거의 추억입니다. 구 공화국 시대에 자란 전통적인 자유주의자인 캄푸스는 1934년 진보당 당원으로 정치 경력을 시작했지만 1937년 신국가 쿠데타로 그의 권한이 소멸되자 곧 그의 야망이 끊어지고 카이샤 연방 은행의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캄푸스는 독재 정권을 종식시키기 위해 다른 자유주의 정치인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했으며, 1950년에 부통령으로 선출되고 1955년에 미나스제라이스 주지사에 선출되면서 부통령직을 향한 그의 길은 공고히 되었습니다. > >캄푸스는 바르가시즘의 권위주의적 조치와 민족주의적 수사학 모두에 대해 강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대신 구공화국과 유사한 국제적 자유주의 국가를 선호합니다. 따라서 그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자유의 방향으로 브라질을 움직이려고 시도하는 정치 인생의 마지막 몇 년을 보낼 계획입니다.}}} * '''알폰소 아리누스''' 외무장관 (외무부 장관){{{#!folding 인물설명 >'''망토와 단검의 계략가''': 암호 해독 {{{#green '''+1'''}}}, AI 변동치: 동맹 호출 욕망 '''+10''', AI 변동치: 공격 중점 '''+50%''' > >알폰소 아리누스 데 멜루 프랑코는 완벽한 브라질 지식인으로, 1927년부터 리우 법대에서 시작하여 첫 번째 박사 학위를 취득한 오랜 학문적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외에 제네바와 몬테비데오, 파리,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세 곳이 더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말해서, 그는 1930년대와 40년대 초반까지 브라질에서 가장 악명 높은 백인 우월주의자이자 우생학 지지자 중 한 명이었지만, 제3제국 내에서 자신의 신념이 구현되고 유럽의 노예가 된 것을 보고 마음이 바뀌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1951년에 인종차별 정책을 불법화한 "알폰소 아리누스 법"을 공식화하기까지 하여 브라질에서 가장 악명 높은 반인종차별주의자이자 열대주의자 옹호자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 >쿠아두르스의 외무장관 알폰소 아리누스는 브라질이 OFN이나 다른 강대국에 얽매이지 않고 외교 정책에서 자신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고 설교하면서 "독립적인 외교 정책"을 위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영향력 영역을 확립하고, 어떤 면에서 친-OFN 우파와도 거리를 둡니다.}}} * '''아르투르 디 실바 베르나르드스 필류''' 재무장관 (재무부 장관){{{#!folding 인물설명 >'''행정의 천재''': 건설 속도 {{{#green '''+5%'''}}}, 연구 속도 {{{#green '''+2%'''}}}, 공장 생산량 {{{#green '''+10%'''}}} > >20세기 최초의 브라질 독재자의 아들인 베르나르드스 필류는 1928년 아버지의 비서로 일하면서 족벌주의를 통해 정치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1930년 혁명의 지지자였던 그는 바르가스와 접촉하고 1934년에 대리인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의 임무는 1937년 신주 쿠데타로 종료되었고 정치적인 항의 후 망명했습니다. 신국가 독재의 여파로 그는 미나스제라이스 주의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주셸리누 정부 기간 동안 아버지와 함께 "Petróleo é nosso(석유는 우리의 것이다)"를 지지했습니다. > >쿠아두르스의 경제부 장관인 아르투르는 정부 지출과 책임 있는 경제 정책의 균형을 유지하는 동시에 브라질의 경제적 독립을 유지하고 기독교 복지 국가에 대한 쿠아두르스의 아이디어를 지지하는 데 호의적입니다.}}} * '''오딜리우 데니스''' 내무장관[* 로트를 사임시킨 이후 1965년 선거 이전까지] (국방장관, 전제주의){{{#!folding 인물설명 >'''범죄 전사''': 매일 정치력 획득 {{{#green '''+0.15'''}}}, 징병 가능 인구 획득치 {{{#red '''-3%'''}}} > >오딜리우 데니스는 20세기 초 브라질의 상황이 만들어낸 특별한 종류의 장군입니다. 구 공화국에서 프로이센 사절단의 훈련을 받아 과두 정부와 신국가 쿠데타를 종식시킨 1930년 혁명에 참여하고 고이스 몬테이로 장군과 가까운 동맹을 맺은 데니스는 20세기 전반에 브라질이 지나는 모든 주요 변화에 참여했습니다. > >그의 권위주의적 경향은 그의 강한 의무감과 규율과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엔히크 톄이셰이라 로트의 친구인 그는 1955년 주셸리누 쿠비쳬크에 대항하여 조직된 11월 쿠데타를 중단시킨 장교 중 한 명이었습니다. 이제 그의 경력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고, 데니스는 어떤 일을 한 사람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그의 성취의 삶을 되돌아볼수 있었습니다. 외부 및 내부 위협으로부터 조국의 독립을 보호해야 할 때 필요했습니다.}}} * '''에르네스토 가이젤''' 내무장관[* 1965년 대선에서 쿠아두르스 당선후 집권시] (국방장관){{{#!folding 인물설명 >'''확고부동한 방어가''': 사단 방어 {{{#green '''+5%'''}}}, 최대 참호 {{{#green '''0'''}}} > >독일계 브라질인인 에르네스토 가이젤은 1930년 혁명에 군인이었으며 1932년에는 입헌주의자들에 맞서 싸웠으며 독일계 브라질인을 동화시키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바르가스에게 우호적이었습니다. 전쟁 동안 그는 리오그란데두술 주의 제3군 지역을 이끌었고, 그의 독일 유산에 대한 감시를 받았습니다. 혁명의 여파로 그는 미국 교육을 받았고 소르보네파의 영향력 있는 회원이 되었습니다. > >쿠비셰크에 대한 쿠데타 동안 중립을 지킨 그는 입헌주의자와 소르보네파 사이의 외교관으로 로트의 신임을 받았으며 때로는 강경파에 맞서 그들과 협력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쿠아둘스ㅡ의 보안 장관으로서 그는 강경파, 공산주의자 또는 지하 파시스트 쓰레기와 같은 내부 위협으로부터 브라질과 민주주의를 보호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 }}} UDN[* 원 소속은 PTN(국민노동당)] 소속 부통령. 로트와 쿠아두르스간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다만 너무 악화되면 오히려 라세르다 등의 야권 정치인들에게 이용만 당하고 사임당할수 있다. 주의요망.] 동시에 쿠아두르스의 영향력이 로트를 압도하게 되면 아마조니아 횡단 고속도로 사업에서의 부패를 폭로하면서 로트를 사임시키고 대통령으로 자리잡으려고 시도한다. 여담으로 상당히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 맨 처음 이벤트가 대통령 회의실에서 랍스터 전쟁을 해결하던 와중 술에 취한 쿠아두르스가 로트에게 전화를 거는 내용이라거나, 라세르다의 음모 편지가 가기 전에 내각의 관계가 붕괴되면 사임 번복 협박까지 하는 등 상당히 과격한 행동을 보인다. 정치적 성향은 가톨릭 보수주의 성향으로 도덕 윤리에 입각한 법안들을 통과하려 시도한다. 국외적으로는 어떤 국가에 친하게 지내는 것보다는 중립적이고 독립적 외교를 지향하는 편. 첫 이벤트만 보면 친일로 보여질 여지도 있으나, 독일에 대항한 남아프리카 전쟁 참전에 부정적인 자세를 보이는 등 균형 외교를 중시...하지만, 후술할 내용처럼 줏대없다는 인상이 강하다.[* 실제 역사에서도 쿠아드르스는 반미&친소친중 및 제3세계 노선을 타면서 빈축을 샀고, 후임인 굴라르는 아예 중국에 방문하면서 1964년 쿠데타의 원인 중 하나를 만들었다. 이런 점 때문에 쿠아두르스는 실제 역사에서도 인해 대통령 재임 기간동안 실질적인 정책은 긴축 정책만을 성공시켰을뿐, 그 이상의 정책을 시행하지 못하고 재임 7개월만에 라세르다의 음모로 사임하고 만다. 인게임에 존재하는 강대국 외교 이벤트를 보더라도 일본/독일 외교에서는 말실수를 하고, 미국 대사와의 회담 이벤트도 미국 대사가 속마음으로 저런 미치광이 때문에 외교가 힘들어질거 같다고 우려한다.] 라세르다, 바후스 등의 음모에 응하여 로트를 사임시키고 그들의 음모에 대항하여 대통령직에 안착을 성공하면, 우선 동요하는 군부들 진정시키기 위해 족벌주의를 눈감아주고 돈을 뿌리며 군부를 달랜다. 이후 자신을 실각시키려 했던 라세르다와 바로스의 약점을 잡아 그들을 약화시키려 하며[*그러나 라세르다의 약점 폭로는 오히려 언론인 출신 라세르다에게 역공당하고, 바로스의 부패를 조사하러 간 경찰들은 바로스에게 구워삶아지면서 두 계획은 모두 실패한다.], 참전 중이던 남아프리카 전쟁에서 이탈하는 법안을 제안하고, 이후 독립 외교를 위한 초석으로 일본, 독일, 미국에게 동등하게 접근하려는 시도를 한다. 이런 점이 과하게 가서, 마지막에는 체 게바라를 브라질에 초청하면서 친 OFN 성향의 UDN 의원들이 우려하는 내용으로 이벤트가 끝난다.[* 라세르다가 일으킨 쿠데타, 체 게바라의 훈장수여등은 실제 역사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쿠아두르스 루트로 진행을 하면, 1965년 선거에는 라세르다가 후보로 도전하지 않는다. 쿠아두르스의 1965년 선거 출마 가능 루트는 정상적인 로트 임기 종료 루트와 쿠아두르스의 도박으로 인한 대통령직 확보 이후 다음 선거 진출 두가지 방법으로만 진행 가능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